2023. 0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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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가끔, 류청우가 배세진의 어깨를 다독여 주고는 했다. 그러면 체격만은 몇 살이나 차이 나는 것 같아 보일 동갑내기는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리면서도 강한 그가 남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약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자신에게만은 스스럼 없이 보여 주는 것이 신뢰의 증거 같아서, 그 순간이 기껍게 느껴진다는 사실에 류청우는 미약한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 * *

 

배세진은 다면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서툰 사람인 듯하면서도 연기 재능만은 출중했고, 빨리 지치는 듯하면서도 이를 악물며 견딜 줄 알았고, 쉽게 휘청이는 듯하면서도 금방 일어섰다.

이러한 면모는 다사다난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거쳐 그룹의 일원이 되면서도 건재했다. 많은 이들이 그를 시기하는 만큼 선망했고, 미워하는 만큼 사랑했다. 배세진은 그 모든 감성의 폭포 속에서 기어코 자신만의 균형을 잡는 데 성공했다. 더는 류청우가 그의 어깨를 다독여 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대부분의 변화가 그러하듯, 배세진이 류청우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물기가 스며들거나 마를 때처럼 자연스럽고 또 점진적이었다.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푹 젖거나 바싹 말라 버리듯이.

 

배세진이 어엿한 한 사람의 스타로서 자립해 가는 것은 동료이자 친구로서 축하하고 응원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류청우는 물론 옆에서 기쁨과 뿌듯함을 주축으로 하는 여러 긍정적인 감정들을 느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묘한 아쉬음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자립은, 그가 더 이상 류청우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음을 뜻했다. 더 이상 류청우 앞에서 약한 모습을 드러낼 이유가 없음을 뜻했다. 그는 이제 타인의 어깨를 빌리지 않고도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균형을 잡을 수 있기에. 류청우는 그런 순간을 기껍게 여겼다는 것이 미안했듯 이러한 아쉬움을 느끼는 것 역시 미안했다.

 

기쁘지만 아쉽다. 응원하고 싶지만 섭섭하다. 양가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끼면서도, 류청우는 웃음 뒤로 그 모든 복잡한 심정을 갈무리했다. 감정이란 의외로 눈을 돌리는 사이 잠잠해지곤 해서, 이렇게 잠시 얼버무려 두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옅어질 터였다.

 

 

2023. 08. 24

S급 가이드 청우 x B등급 에스퍼 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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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공원에서 만난 강아지가, 점심에 구내식당에서 누군가가, 그러고 보니 아침에 일어났을 때 하늘이……. 류청우는 별거 아닌 이야기를 조곤조곤 늘어놓으며 파트너의 손가락을 마디마디 주물러 주었다. 과호흡이 점차 가라앉고 경직된 근육이 풀려 가는 게 느껴졌다. 갈 곳을 잃었던 눈동자가 점차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도.
부드럽게 손을 마주 잡은 류청우는 웃으며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에 네가 말했던 책을 마저 읽고 있는데, 그때 내가 알려 줬던 단골 음식점에서 이번에…….

관심 없을 법한 평범한 일상에서 '우리'의 이야기로. 가이드가 자신과 무관한 사소한 이야기를 하면 에스퍼는 자극이 적으면서도 안정을 주는 가이드의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조금씩 가이딩 에너지를 불어넣으면서 경직이 살짝 풀릴 때쯤, 본인과 연관된 주제로 옮겨 간다. 에스퍼가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시선을 맞추고 본격적인 가이딩에 들어간다. 류청우가 늘 애용하는 가이딩 방식이었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
"……응."

 

배세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라며 류청우는 한 번 더 웃었다.
손을 맞잡은 채 얼마간 이야기를 더 이어 갔다. 다른 에스퍼를 대할 때처럼 담백한 스킨십만으로도 류청우는 배세진을 금방 안정시킬 수 있었다. 배부른 투정인 걸 알면서도, 이런 순간에 류청우는 제 높은 등급이 한 번씩 아쉬워졌다.

 

"무슨 생각 해?"
"……아무것도 아니야."

 

내 등급이 조금이라도 낮았더라면, 가이딩을 핑계로 너를 안아 볼 수 있었을까.
입 밖으로 내지 못할 속내를 선선한 웃음으로 가렸다.

 

* * *

 

가이딩을 마친 후에는 늘 그랬듯, 오늘도 류청우는 무던한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배세진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마주 잡았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어 뒤늦게 열이 오르는 귓가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가이딩은 거둬진 지 오래인데 어째서 이렇게 간질거리는 듯한 착각이 드는 걸까.

류청우가 등급이 높은 만큼 많은 에스퍼를 담당할 수 있어 자신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배세진은 가끔 상상해 보곤 했다. 조금이라도 네 등급이 낮아서 그 핑계로 포옹이나마 해 볼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끔찍한 두통과 이명에서 벗어난 순간, 네 품에서 눈을 떠 볼 수도 있었을까.

입 밖으로 내지 못할 속내를 달아오른 귀와 함께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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